2019/09/24

존엄하게 산다는 것 [칸트의 정언명령] / 선량한 차별주의자

존엄하게 산다는 것 /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정언명령에 충실



자기 자신의 대체 불가능함을 깨닫는 사람은 존엄에 대한 인식에 이르게 된다. 




사람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 존엄의 보편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실패와 만남이 필요하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 무너져 내리는 실패를 경험했을 때 인식의 한계를 넘는다. 이런 실패는 대부분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실패는 그저 성공하지 못함이 아니라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한계의 자각이다. 사도 바울이 예수를 만나는 경험과 같은 회심이 바로 이런 실패를 의미한다. 살면서 맺는 좋은 인간관계가 존엄에 대한 의식 자체를 일깨울 수 있다. 




오늘날의 글로벌 디지털 사회에서는 먼저 목소리를 높여 주목을 받고, 다른 사람을 기만하고, 남에게 영리하게 책임을 떠넘길 수 있는 사람만이 명예와 권력, 영향력을 손에 쥐는, 그런 사람이 성공의 본보기가 되는 시대이다. 이렇게 '성공한 사람'이 '존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대체한다. 존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사라진다. 스스로의 존엄을 유지하고 타인의 존엄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가 섣불리 나서지 않고 주의깊고 신중하다는 것이다. 



나는 차별하지 않을까? 아니면 차별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일 뿐일까?
스스로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하지 않는다고 믿는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에 관한 이야기 
이주민에게 "한국인 다 되었네요"
장애인에게 "희망을 가지세요"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학자들은 '평범한 사람이 가진 특권'을 발견했다. 일부가 가진 권력만 특권이 아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겐 시외버스를 타는 일도 특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등이라는 대원칙에 동의하고 차별에 반대하지만 특권을 가진 집단은 차별을 덜 인식한다. '국가 권력에 맞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외쳐왔지만 주류로서의 특권을 인식하지 못해 차별적 태도를 보이는 진보 정치인'이 대표적이다. 
장애인이 버스를 타면 시간이 더 걸리니까 돈을 더 많이 내야 하는 것 아닐까요? 비장애인에게 유리한, 기울어진 공정성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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